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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터 섬의 역사! 이스터 섬의 비극!

by Blue Bloods 2021. 6. 23.

이스터섬-위치
이스터 섬 위치

한때 거대한 야자수가 울창했던 아름다운 화산섬,  특히 모아이 석상으로 유명한 이곳은 이스터 섬입니다. 평화로웠던 이 작은 낙원이 황폐한 식인섬이 돼버린 사연은 무엇일까요?  슬프고도 끔찍한 운명을 떠안은 이스터 섬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봅니다. 남미 칠레에서 약 3500km 떨어진 태평양에는 홀로 고립되어 있는 외딴섬이 하나 있는데요,  이 섬은 제주도 크기의 10분의 1 정도에 불과한 작은 화산섬입니다. 기원 후 900년 경 해양 탐험 고수인 폴리네시아 사람들이 이스터섬에 처음으로 정착합니다. 섬의 전설에 의하면 호투 마투아라는 족장이 두 개의 카누에 50여 명을 이끌고 정착하여 공동체를 만들어가는데요,  사방으로 아득한 수평선만 보이는 이 섬에 고대인들이 대체 어떻게 도착할 수 있었는지는 지금까지도 미스터리한 일로 여겨집니다. 

 

고대 원주민들이 무사히 정착한 이 섬은 온난 다습한 기후로 풍부한 자연 자원을 갖고 있었는데요,  연구에 의하면 특히 직경 2m, 높이는 24m에 이르는 거대한 야자수들이 섬 전체를 뒤덮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화산 폭발 덕분에 비옥한 토양까지 가졌으니 이곳은 축복의 땅이었습니다. 훗날 원주민들은 큰 섬이라는 의미로 이곳을 라파누이라 칭했습니다. 섬의 사람들은 돌고래와 물고기, 새에서 살코기를 얻었고, 바나나와 고구마, 사탕수수 등을 먹고 살아가는데요,  나중에는 사탕 수수 즙을 너무 많이 섭취한 탓에 20대쯤 되면 모두가 충치를 앓았습니다. 한 가구당 5명에서 15명 정도의 식구가 함께 살았는데요, 섬의 인구는 최소 6천 명에서 최고 3만 명에 이를 정도로 늘어납니다. 이 섬에는 족장과 평민의 계급이 있었는데요,  족장과 지배 계급은 하레파엔가라고 불리는 집에 살았습니다.

모아이석상
모아이 석상

12m 길이의 하레파엔가는 해안 지대를 따라 쭉 지어졌고, 평민들이 사는 작은 집은 훨씬 내륙 쪽에 지어집니다. 이스터 섬사람들은 완전한 고립 속에서 그들만의 특별한 문명을 만들어갔습니다.  그로부터 대략 1천 년의 시간이 흐른 1722년,  네덜란드 탐험가 로헤벤이 이 작은 섬을 발견하는데 그날이 마침 부활절이었기 때문에 그는 섬의 이름을 이스터라고 지었습니다. 로헤벤이 이스터 섬에 도착했을 때 이곳에는 아주 기괴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는데요,  나무 한 그루도 눈에 띄지 않는 황량한 벌판에 수백 개의 거대 석상들이 서 있었던 겁니다. 이 모아이 석상의 수는 887개에 달했는데 평균 크기는 4m고 가장 큰 것은 21m에 이르렀습니다. 조상의 얼굴을 신격화한 듯한 이 석상들은 전부 바다를 등지고 내륙을 향해 있었는데요,  그중 약 100여 개의 석상은 붉은 모자인 푸카오를 쓰고 있었으며, 이상하게도 쓰러져 있는 석상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런 거대 석상들을 이 불모지에서 인력으로 만드는 건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에 모아이 석상은 세계 7대 불가사의로 꼽히게 되는데요,  모아이가 아틀란티스의 유적이거나 외계인의 작품이라는 주장까지 나왔습니다. 이스터 섬에 사람이 처음 정착한 지 약 1천 년 만에 이 섬의 무성했던 나무는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모아이 석상만 남게 됐습니다. 그동안 이들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다시 기원 후 900년대로 돌아가 봅니다. 이스터 섬에 정착한 원주민들은 섬의 평화와 번영을 기원하기 위해 열심히 모아이 석상을 만들었습니다. 이스터섬 3개의 화산 중 하나인 라라쿠에서 응회암을 채굴하고., 그 상태에서 석상을 조각한 다음 떼어냅니다. 이렇게 만든 무거운 석상을 운반하려면 많은 나무를 베어야 했는데요, 이들은 나무를 잘라서 아래에 깔아 굴림대를 만들었고 그 위에 조각한 석상을 해안까지 굴려서 운반했습니다.  모아이 머리 위에 붉은 푸카오는 족장만 쓸 수 있는 모자를 상징하는 것으로 추측됩니다.

모아이석상-모자
모아이 석상 모자

이런 모아이 석상은 이스터 원주민들만의 훌륭한 거석 문화인 동시 재앙의 도화선이었는데요, 인구 증가가 정점에 이른 시점부터 약 200년 만에 모아이와 함께하던 이들의 사회가 붕괴된 것입니다. 인구가 늘어날수록 다용도로 쓰이는 목재가 빠르게 소모되어갔는데요,  이렇게 숲이 파괴되니 땅도 점점 황폐해졌고 숲에서 얻을 수 있었던 천연자원들도 사라져 갑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원이 떨어져 갈수록 이스터의 지배층들은 더 큰 모아이를 만들려고 했는데요,  마지막 나무가 베어지는 그 순간에도 모아이 석상이 만들어지고 있었습니다. 이스터 섬 지배층들은 자신들의 위치를 견고히 다지기 위해 위기가 올수록 더 절실하게 거대한 석상을 세워봤지만 이미 섬은 피폐해지고 있었습니다. 잡아먹을 야생동물까지 사라진 마당에 물고기를 잡으러 나가고 싶어도 배를 만들 나무가 없습니다. 이 고립된 섬에서 더 이상 먹을 것을 구할 수가 없었던 겁니다. 오랫동안 극도로 굶주린 사람들 사이에 결국 끔찍한 재앙이 닥치고 말았습니다.

 

이스터 섬에 식인 풍습이 발전하기 시작한 겁니다. 이스터 섬의 구전설화에서 빠지지 않는 게 바로 카니발리즘인데요, 이는 동족 포식, 즉 식인이라는 뜻을 가집니다. 이스터 섬 사람들이 적에게 할 수 있는 제일 심한 욕설은 바로 "니 엄마의 살을 씹어먹겠다.", 혹은 "아침에 먹은 니 엄마의 살이 이발에 끼어 있다."였습니다. 오죽하면 이스터섬을 연구한 학자가 이 섬의 역사를 연구할수록 모아이 석상을 증오하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이스터 섬의 언어를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하면 이들의 언어에는 식인과 연관된 말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 그 정도로 이스터 섬에 식인 문화가 보편화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식인과 기근 싸움이 반복되면서 섬은 그야말로 초토화되고 말았는데요, 씨족 간의 싸움은 상대 씨족의 모아이 석상을 파괴하는 행위로 이어졌습니다. 과거에 섬을 지켜달라며 모두가 힘을 합쳐 만든 모아이를 지배층을 향한 울분과 함께 그들 스스로 쓰러뜨려 갑니다. 이런 붕괴의 정점에서 쿠데타가 일어났고 이후에 살아남은 사람들은 새로운 종교와 함께 다시 섬에서 생존해 갑니다.

 

이들은 이전의 종교를 버리고 새의 머리를 가졌다는 마케마케 신을 믿으면서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갑니다. 매년 새인간이라는 뜻의 탕카타 마누를 뽑고 탕카타 마누가 1년 동안 모두를 통치하도록 했습니다. 매년 오롱고라는 곳에서 이 탕카타 마누를 뽑는 의회가 열렸는데요,  남자들은 200m가 넘는 오롱고 절벽을 타고 내려가서 1.4km 떨어진 작은 섬까지 헤엄쳐갔고 거기서 새알을 구해오는 경기를 펼쳤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평화를 찾기 위한 노력은 결국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1774년 영국의 탐험가인 제임스 쿡이 잠시 섬에 머문 이후로 이곳에는 유럽인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졌는데요,  유럽인들은 이스터 섬에 천연두와 매독 같은 전염병을 전파시켰고,  이런 병에 대해 전혀 면역이 없던 원주민들은 꼼짝없이 죽어갔습니다. 불행은 여기서 끝난 게 아니었습니다.  이스터 섬 원주민들을 큰 충격에 빠뜨린 사건이 있었는데요,  1862년 2천여 명의 원주민들이 페루로 납치된 겁니다. 끌려간 원주민 중에는 왕과 성직자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노예 상인들에게 수많은 원주민이 잡혀갔고,  대부분은 노역을 하다가 죽어갑니다. 그래서 1877년 경에는 섬에 살아 있는 주민이 고작 111명에 불과했습니다.

칠레의회진출-도전여성
의회 진출 도전 여성

이스터 섬의 붕괴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존재하는데요,  원주민들이 자원을 스스로 고발시킨 탓이라는 주장, 혹은 유럽이 몰고 온 질병과 노예사냥 탓이라는 주장 등이 있습니다. 이스터 섬의 비밀을 제대로 밝히기 위해서는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한 상황입니다.  현재 이스터 섬 원주민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1888년 칠레 정부가 이스터 섬을 병합하였고, 1966년에는 이스터 섬 사람들이 공식적인 칠레 국민이 됩니다. 칠레의 통치 이후 섬은 발전했지만 원주민들의 삶은 탄압과 차별로 피폐해져 갔습니다. 이스터 섬에서 시행된 관광산업과 칠레인 이주 정책으로 원주민들이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지고 저임금 노동에 시달립니다. 현재 원주민들은 칠레 정부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비폭력 시위 운동을 벌여왔는데요,  원주민들이 독립을 원하는 이유는 아주 명확합니다.  우리 땅에서 우리 스스로 통치하면서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2017년에는 이스터섬의 독립을 위해 라파누이 여성 최초로 칠레 의회 진출에 도전한 이도 있었지만, 이들의 노력은 국제사회에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스터 섬은 언제쯤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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