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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역사!(순삭정리)

by Blue Bloods 2021.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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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국기

현대적인 대도시와 100년 넘은 요새의 벽, 그리고 곰과 사슴이 뛰노는 숲이 공존하는 나라,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 중 하나로 알려진 단풍 국 캐나다입니다. 현재의 평화로운 캐나다가 있기 전 이 땅에서는 어떤 역사가 펼쳐졌을까요? 지금부터 짧지만 박진감 넘치는 캐나다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봅니다. 수천 년 전 캐나다 땅에는 각각의 언어와 문화를 가진 여섯 부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곳에 처음으로 발을 들인 유럽인은 약 1천 년 경 그린란드와 아이슬란드에서 온

바이킹들인데요, 처음에 원주민들은 이들을 우호적으로 대해주었지만 시간이 지나도 바이킹들이 떠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아예 눌러앉으려는 바이킹들과 원주민 사이에 싸움이 붙었고 결국 바이킹이 이 땅을 떠나게 됩니다.

 

 

세인트로렌스강
세인트로렌스강

이후 1500년 경 아메리카 대륙을 둘러싸고 슬슬 다양한 사건이 터지기 시작하는데요,  이 시기 유럽의 대항해 시대가 열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프랑스 역시 신세계에 번쩍 눈을 뜨고 있었습니다. 1534년 프랑수와 1세의 신하였던 프랑스 탐험가 자크 카르티에가 세인트 로렌스 강에 이르렀고 그 주변 지역을 프랑스의 땅이라고 선언하기 위해 10m 길이의 십자가를 땅에 심고 프랑스 왕실기를 새긴 명판을 붙입니다. 이렇게 북아메리카에 프랑스의 식민지가 탄생하니 이곳이 바로 누벨 프랑스입니다. 현재 캐나다의 국명은 원주민 이로쿼이족의 언어로 마을 또는 정착을 뜻하는 '카나타'에서 유래합니다. 이제 카르티에 일행은 이곳에서 겨울을 날 준비를 하게 되는데요, 캐나다의 겨울은 상상 초월의 혹독한 추위 그 자체였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괴혈병까지 창궐하자 카르티에의 선원들은 팔다리가 붓고 고열에 시달리다가 죽어갑니다.

 

 

몇 번의 원정 시도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선원들이 죽어나가자 카르티에는 쓰라린 실패를 받았들여야 했습니다. 그 후 60년의 세월이 흐를 동안 프랑스는 북아메리카 대륙에 정착하겠다는 생각을 버리게 됩니다. 하지만 다른 유럽 국가들이 계속 아메리카 대륙을 탐사하자 프랑스는 슬슬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1608년 프랑스 지도 제작가인 사무엘 드 샹플랭이 마침내 이 땅에 성공적으로 정착하여 퀘백 식민지를 건설하는데요,  원주민들은 유럽에서 온 사람들을 경계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곳에서 살아가는 법을 친절하게 가르쳐줍니다.  새로운 정착민들은 원주민들과 비버 모피 무역을 이어갑니다. 이 정착민들이 바로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의 조상입니다.  17세기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갖고 있던 영국과 프랑스는 계속해서 뺏고 빼앗기는 식민지 공방전을 벌이는데요,  북아메리카 대륙 역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북아메리카의 영국, 프랑스 식민지는 땅의 경계가 불분명해서 두 나라는 물론 동맹 맺은 인디언들까지 싸우고 또 싸우는데요,  영국과 프랑스의 싸움이 거세질수록 북아메리카의 식민지인들은 점점 더 고통받기 시작합니다. 1750년대에 이르자 영국과 프랑스 등의 식민지들이 제대로 한판 붙게 되는데 이것이 7년 전쟁입니다. 처음 몇 년간은 프랑스가 우세하는 듯했으나 결국 1759년 영국군이 퀘벡시티를 함락해버립니다.  이 전투는 이후 캐나다에서 제일 유명한 전투 중 하나가 됩니다. 루저가 된 프랑스는 위너 영국에게 계속해서 북아메리카의 땅을 내줘야만 했습니다. 퀘벡이 함락되어 영국령 식민지로 바뀌어버리자 프랑스계 지도층은 본국으로 냅다 도망치고, 농사를 짓던 6만여 명의 주민들만 남았는데요,  그들과 그들의 후손들은 이후 오랫동안 차별을 받으며 살아가게 됩니다.  한편 프랑스로부터 당당히 땅을 넘겨받아 의기양양해진 영국, 하지만 관리할 땅이 커진 만큼 부작용도 생겨납니다.

 

 

미국독립전쟁
미국 독립전쟁

영국이 퀘벡을 점령한 상황은 30평이었던 집이 한순간에 100평으로 넓어진 것과 같았습니다. 땅이 커진 만큼 행정 처리를 위한 유지비가 많이 필요해졌고 결국 북아메리카 식민지에 세금 폭탄이 떨어지는데요,  그 외 복합적인 이유로 영국과 식민지의 관계가 나날이 악화되자 결국 13개 식민지가 결속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영국이 폐전합니다. 이것이 1775년에 일어난 미국 독립전쟁입니다. 미국 독립전쟁 기간 5만여 명의 미 식민지인들이 캐나다 북쪽으로 올라오는데요,  새로운 이주민들은 주로 온타리오와 대서양 주에 터전을 닦아갔고,  이제 캐나다에는 프랑스계와 영국계 주민의 비율이 균형을 잡게 됩니다. 1791년 넓은 퀘벡주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정책이 시행되면서 퀘벡이 두 개로 분리되는데요,  세이트 로렌스 강 하류 지역은 로어 캐나다, 상류 지역은 어퍼 캐나다가 됩니다.

 

어퍼 캐나다의 영국계 이민자들과 로어 캐나다의 프랑스계 이민자들은 각각 주민들이 투표로 선출한 시 의회를 구성할 수 있었는데요. 프랑스계 주민이 압도적으로 많은 로워 캐나다에서는 프랑스 시민법과 가톨릭 신앙의 유지도 허용됩니다. 이렇게 영국의 너그러운 식민지 정책 속에서 두 지역은 나름의 안정적인 정치 체계를 만들어갑니다. 한편 영국을 이기고 독립에 성공한 미국, 그리고 영국령 캐나다는 국경 등의 여러 가지 문제가 누적되면서 분위기가 험악해지는데요, 당시에 미국은 사실상 초강대국인 대영제국과 함부로 전쟁을 일으킬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은 영국이 나폴레옹과 싸우는 틈을 타서 만만한 영국령 캐나다 지역을 향해 총구를 들이밉니다.  1812년 미영 전쟁이 터진 것입니다.  치열한 전투가 이어지던 1814년, 나폴레옹의 항복으로 영국과 프랑스의 전선이 종결되는데요, 이제 영국이 미국과의 전쟁에만 집중하기 시작하면서 곧장 미국의 수도인 워싱턴 dc에 육군을 투입해 버립니다.

 

 

영국이 워싱턴 dc를 함락하고 백악관을 불태운 것은 미국의 흑역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점차 교착 상태에 빠져들면서 1814년 겐트 조약으로 전쟁이 마무리됩니다. 그런데 이때 캐나다가 퀘벡과 원주민까지 연합하여 불굴의 투지로 미국에 맞선 것은 아주 중요한 것을 남겼는데요, 미영 전쟁을 겪은 캐나다인들이 미국을 더욱 경계하게 된 반면 캐나다를 향한 애국심은 무럭무럭 싹트기 시작한 겁니다. 전쟁으로 얻은 가장 값진 가치는 수많은 영국계 정착민들이 스스로를 영국인이 아니라 캐나다인으로 생각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전쟁 후에는 영국 본토에서 힘들게 살아가던 사람들이 영국령 캐나다로 몰려들기 시작하는데요,  이 때문에 또 새로운 문제들이 속속 등장합니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캐나다는 영국 본토에 비해 적극적인 정치 개입도 못하고 이래저래 맘고생을 하는데요,  특히나 프랑스계 주민들이 사는 로어 캐나다는 영국 관리들의 부정부패로 고통받게 됩니다. 

 

식민지 정부에 대한 불만은 프랑스인뿐만 아니라 아일랜드 가톨릭 교구들과 다른 소수민족 사이에서도 고조됩니다.  결국 내부의 문제가 쌓이고 쌓이던 1837년,  로어 캐나다에서 반란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프랑스계 반란군과 영국 정규군의 전투에서 승리의 영광은 영국군이 거머쥐게 됩니다.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은 영국에 대한 원한을 가슴 깊숙이 새기게 됩니다.  그런데 같은 해 예상치 못한 일이 또 터집니다. 어퍼 캐나다에서도 반란이 일어난 겁니다. 약 15년간 빠르게 성장 중이었던 어퍼 캐나다에는 기존의 영국계 주민들뿐만 아니라 미국에서 넘어온 주민들도 많았습니다. 이들은 영국에 대한 충성심과는 관련이 없는 데다가 미국에 살던 시절 직접 선거권을 행사해 본 경험을 통해 모든 사람들이 동등하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퍼 캐나다의 주민들은 총독과 자문위원회가 쥐락펴락하는 정부 체제에 불만이 많았습니다. 마침내 정치인 맥캔지의 주도로 어퍼 캐나다가 반란을 일으키지만 조직력이 약한 탓에 쉽게 진압되고 말았습니다. 

 

 

로어 캐나다와 어퍼 캐나다의 반란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지만 영국을 불안하게 만들기엔 충분했습니다. 더 이상 식민지 주민들의 불만을 묵살하기 어려워진 영국이 결국 1840년 연합법을 통과시킵니다. 이로써 어퍼 캐나다와 로어 캐나다가 한 정부 아래에 통합되어 캐나다의 이름으로 새 출발하게 됩니다. 하나가 된 캐나다 주에는 활력이 넘쳐납니다. 새로운 삶을 기대하는 이민자들이 아일랜드와 영국 각지에서 몰려 다양한 이민자들로 이루어진 노동자들은 캐나다의 철도를 짓고 광산을 건설하기 시작합니다. 어느덧 미국과의 관계는 회복되어 이제 사이좋게 무역하는 사이가 됩니다. 1861년에 미국 남북 전쟁이 일어나자 캐나다는 전쟁 물자를 팔며 경제적 이익을 두둑하게 챙기기도 합니다.  빠르게 성장하는 캐나다였지만 미국은 한 발 더 앞섰습니다.  미군은 내전으로 쌓은 실전 경험과 신무기들로 완전 무장했고,  경제를 복구해가며 세계열강으로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괴물 같은 이웃나라의 성장에 위기를 느낀 캐나다,  혹여 미국에 잡아먹히기 전에 캐나다와 기타 식민지들은 손을 잡아야만 했습니다.  결국 1867년 7월 1일 영국에 의해 '캐나다'라는 이름의 자치령이 탄생합니다. 영국령 북아메리카의 새 식민지였던 캐나다 주, 뉴브런즈윅, 노바스코샤가 통합되어 영국 정부의 허가 아래 헌법을 수정할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캐나다의 건국은 아주 평화롭게 이루어졌습니다. 캐나다는 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조금씩 영국의 손아귀를 벗어났고 그들만의 정책을 추구해 갑니다. 1931년에는 영국 웨스트민스터 헌장 발표와 함께 캐나다가 영국과 동등한 지위를 가진 국가임이 인정됩니다. 농업 국가인 캐나다가 산업 국가가 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시기였는데요. 이때 캐나다에 대량 건설된 군수 생산기지들이 전쟁 후 민간 산업시설로 바뀐 것입니다.

 

 

캐나다지도
캐나다 지도

캐나다의 산업화는 유럽이나 미국 출신 백인에게 특혜를 주던 기존의 이민 정책을 바꾸는 계기가 되기도 하는데요. 1967년 이민 점수제를 도입하여 국적과 혈통의 문턱을 없애버린 겁니다. 이 획기적인 이민 정책으로 세계 각국에서 이민자들이 들어오니 이제 캐나다에는 절대적 주류가 없어집니다. 현대의 세계화 시대를 맞은 세상은 다양한 문화와 인종이 공존하는 모델을 추구하고 있는데요, 캐나다는 이미 세계 시민 국가의 모습을 실현하고 있었습니다.  1982년 캐나다가 영국에게서 완전히 독립하면서 영국의 허락 없이도 자치적인 헌법을 만들 수 있게 됩니다. 1985년 철도 공사가 마무리되어 지역 간의 교류가 확대되고, 1900년대에 앨버타주와 사스카추완 주가 형성된 현재 캐나다 연방의 모습이 완성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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