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산 박서원, 미군에게 협박 메일을 받은 이유!
박서원은 두산 박용만 회장의 장남으로 그의 아버지와 이마트 정용진 부회장을 이어 sns 하는 대표적인 재벌로 유명한데, 광고 대행사 오리콤과 보그 같은 유명 패션지 라이선스를 보유한 두산 메거진에서 광고 패션 쪽 일도 하고 있다 보니 연예인과 찍은 사진이 자주 포착되곤 합니다. 상위권 대학 졸업 후 MBA를 거쳐 경영 수업에 들어가는 보통의 재벌 자제와는 달리 방황의 청소년기를 보냈다고 합니다. 그의 고등학교 성적은 53명 중 50등이었는데, 뒤에 있는 3명마저도 2명은 취업반, 나머지 한 명은 운동부여서 사실상 꼴찌였다고 하며 그나마 영어 성적이 괜찮아 정원 미달로 단국대 천안 캠퍼스에 간신히 합격했지만 이마저도 경영학에 재미를 못 느껴 1년 반 동안 스트레이트로 세 번의 학사 경고를 받게 됩니다. 제적당할 상황에 놓이게 되자 퇴학보다는 자퇴로 이력에 남는 게 낫다고 생각해 스스로 학교를 나오게 됩니다. 자퇴하고 도피 유학을 떠났습니다. 당시 그는 미국에서도 길을 찾지 못하면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어 "자신은 도대체 왜 공부를 못 할까?"라는 고민을 시작하면서 재미없으면 때려 죽어도 안 한다는 자아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재미있는 전공을 찾기 위해 경영학을 시작으로 사회학 범죄심리학, 기계공학, 화학과를 거쳐 5번의 전공을 바꾼 끝에 드디어 산업 디자인에 흥미를 보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학교가 산업 디자인으로 유명하지 않아 또 한 번의 자퇴를 강행합니다. 그래도 다행히 하고 싶은 일을 찾게 되자, 일단 군 문제를 해결하자는 생각으로 육군에 입대, 병장 만기 제대 후엔 SVA에 들어갔습니다. SVA는 'School of Visual Art'의 약자로 뉴욕의 대표적인 미대 중 하나로 알려져 있는데, 거기서 27이라는 늦은 나이에 디자인을 시작하다 보니 어릴 때부터 미술을 배운 과친구들과 경쟁하기 위해 두 시간 자면서 공부를 하기 시작했고, 결과적으로 하루 2시간 공부도 하지 않았던 그는 좋아하는 일을 찾게 되면서 180도 바뀐 삶을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이 시기에 같은 학교를 다니고 있던 이제석을 만나 그의 커리어를 정점에 올려놓게 됩니다.
참고로 이재석은 심플한 시각적 전달 방식을 통해 광고 천재라는 별명을 갖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광고인입니다. 그는 노약자나 장애인들이 올라갈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는 메시지인 '누군가에게 이 계단은 에베레스트 산입니다' 같은 공익 광고를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치약 하나 바꿨더니 이가 빛난다'라는 상업 광고도 만든 적이 있는데, 특히 이제석은 박서원과 함께 총을 든 한 군인의 사진을 전봇대에 돌돌 말아 총구가 본인을 가리키게 하여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처럼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낳으니 이라크 전쟁을 당장 멈춰야 한다는 광고를 만들어 클리오를 포함해 세계 5대 광고대회에서 수상한 최초의 한국인들이 되기도 했습니다. 여담으로 이 광고가 나가고 1만 통이 넘는 이메일을 받았다고 밝힌 적이 있으며, 그중 미군에게는 죽여버리겠다는 협박 메일을, 알카이다로부터는 용감한 형제라는 극과 극의 메일을 받았다고 직접 밝히기도 했습니다.
재벌 2세라는 말을 제일 싫어했다고 합니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다이아를 물고 태어나서가 아닌 스스로 노력해서 성공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라고 말하며 "아버지에겐 자신이 대외적으로 인정받기 전까지 아들이라는 걸 공개하지 말아 달라."라고 부탁까지 했다고 하는데, 실제로 그는 앞서 설명드린 반전 포스터로 2009년 세계 5대 광고제 수상과 더불어 2010년에는 투명 플라스틱 배터리를 선보여 담배가 우리 몸에 얼마나 해로운지를 간접적으로 보여줘 세계 5대 광고이자 세계 3대 광고제이기도 한 뉴욕 원쇼에서 3년 연속 수상하는 성과를 냈고, 그제서야 그는 아버지가 두산 박용만 회장임을 밝혔다고 합니다. 이런 스토리가 퍼지자 언론은 글을 자수성가한 인물로 묘사하곤 했는데, 이를 본 사람들은 일반적인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이 학사 경고 5번에 자퇴 2번, 전과 5번 등을 할 수 있는 시간적, 경제적 조건이 되겠냐며 그의 스토리를 부정한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삐에로 쑈핑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박서원 대표는 2018년 두타몰에 입점한 삐에로 쑈핑을 홍보차 방문했는데 당시 함께 했던 직원이 문어 모자를 써보라고 권유하자 "이런 거 안 해도 난 문어야."라며 셀프디스를 시작하더니 끝내 본인의 머리를 내놓으면서 역대급 흑역사를 만들 정도로 열심히 홍보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2년이 채 되지 않아 삐에로 쑈핑은 사라져 버리게 된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와 관계가 매우 좋은 것 같습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sns에서 엄청난 활동량으로 함께 찍은 사진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는데 사진 중에는 박서원 대표가 버킷 챌린지 다음 주자로 자신의 아버지 박용만 회장을 지목해 직접 물을 붓기도 했으며, 가가 jtbc 아나운서였던 조수애 씨와 재혼할 당 박용만 회장은 단상에 올라 요즘 대세는 민머리라며 조크로 그의 아들을 치켜 세운 적도 있습니다.
참고로 박서원 대표는 범 LG가 구원희 씨와 한 번의 이혼 경험이 있습니다. '생각하는 미친놈'이라는 그의 책 이름처럼 사회 공헌도 남다르게 한 적이 있습니다. 미혼모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그는 미혼모를 줄여보고자 콘돔을 만들었고 여기서 생긴 수익금으로 보육원 기부와 성교육 콘텐츠를 만들었으며, 땅에 떨어져 상품 가치가 없는 과일로 '이런 쨈병'이라는 잼도 만들어 자연재해로 힘들어하는 농가를 도왔다고 합니다. 참고로 보건복지부 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낙태 건수는 1천 명당 15.8회로, 이는 oecd 36개 나라 중 스웨덴, 에스토니아 다음으로 높은 수치였다 합니다. 광고로는 성공한 그이지만 경영에서는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했습니다. 2006년 이제석과 함께 창업한 '빅앤트'를 그가 100% 출자하여 2014년 법인으로 전환했고 공정거래법에 따라 두산 계열사로 들아갔는데, 계속되는 적자로 돈을 빌려 쓰다 보니 부채가 7억까지 늘어나 더 이상 운영하기 힘들다고 판단, 법인 전환 3년 만에 어쩔 수 없이 해산을 결정하게 됩니다. 또한 2015년 면세점 유통을 담당하는 전무로 영입됐지만 명품 브랜드 점에 실패하는 등 이렇다 할 성과를 보여주지 못하여 두산이 면세 사업을 접었던 작년부터 사업 보고서에서 그의 이름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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